그녀가 옷을 입어보기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 그는 자신이 입을 옷을 직접 고르기로 했다. 사실 그녀가 그에게 내민 옷은 충격적일 정도로 깜찍한 무늬가 들어간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정작 자신의 옷으로는 편안한 디자인의 튜닉이나 부드러운 재질의 카디건을 고르고 있었으면서―스스로 고르지 않으면 아무래도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
그는 손바닥만한 거울 앞에서 거칠거칠한 턱을 문지른다. 눈가의 그늘은 밤 사이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오늘은 휴일이었고, 그는 어제 늦은 밤까지 일에 매달려 있었다. 기한이 한참이나 남아 있는 작업이었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는 것보다는 집중할만한 일거리를 붙들고 머리를 박고 있는 편이 나았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어.’ 터무니없이 작은 크...
아침이 와도 해가 뜨지 않을 희미하고 서늘한 어둠 속에서, 베레티 스피넬라는 늦은 밤의 기억을 되새기며 입술을 깨문다. 살갗에 올라온 잔소름을 손으로 쓸며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긴장과 기대로―하지만 대체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소스라친 몸은 쉬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쉰다. 그녀는 사랑의 묘미를 아는 사람이었고, 서로를 알아나가는 과정...
캐러밴의 연구원들은 범우주적으로 공인된 괴짜 집단이다. 각 분야의 전문지식과 지성, 열정을 두루 갖춘 학자들의 모임이란 다시 말해, 자신의 전문 분야를 제외하면 아는 것이 없는,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라고는 되지 않는 흥분한 책벌레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잊어서는 안 된다. 날고 기는 천재들이 한데 모여 연구를 합네 실험을 합네 온갖 주접을 떨며 소란...
신기한 여자였다. 곧고 가는 목덜미와 나른한 눈매가 암사슴 같은 여자, 강철과 플라스틱으로 지어진 도시에서 길을 잃은 님프. 숲을 연상시키는 푸른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감미롭게 지저귀는 목소리는 듣기에 좋았다. 남자는 이 묘한 구석이 있는 외계의 여인에게 흥미가 있었다. 어쩌면 가여운 친우의 절실함이 되려 남자의 구미를 돋우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사랑...
‘관리직원 전용 출입문48F부터 15미터 전진. 코너에서 우회전하면……좌측 벽면에 부착된 차단문 개폐용 패널과 투척형 소화캔. 차단문 좌우 상단 천장 구석에 감시카메라. 사각지대는 없음.’ S는 연구단지 복도 벽면을 더듬으며 걷고 있었다. '관리직원용 도구함. 여기도 굳게 잠겨 있군. 전용 인증키가 필요한가? 청소도구함 치고는 제법 튼튼한 문인데. 긴급 호...
다음날 새벽, 나무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다. 일라나이는 슬픔에 잠기지 않았다. 그들은 여느 때와 같이 연회를 준비하고, 고인의 아름다운 지난 생애를 추억하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나이든 일라나이 중에서는 간혹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것은 비탄의 눈물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옛 추억의 여운에 젖어 흘리는 눈물이었다. 노인이 평생 길러온 나무...
주정뱅이 사내가 가져온 과일주 덕분에 연회는 밤이 늦도록 이어졌다. 연회는 무르익어가고 춤추는 이들은 발이 엉킨다. 하프를 닮은 현악기를 어루만지며 노래를 부르는 일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흥을 돋우었다. 일라나이 여럿이 모여 서로 입을 맞추었다 껴안았다 가슴을 떠밀었다 하며 즐거이 희롱하는 모습은 더없이 천진하면서도 야릇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혀가 ...
노인은 나무등걸에 앉아 마른 고기조각을 작게 잘라 입에 넣고 어금니 틈에서 가만히 불린다. 그들은 살과 잎의 균형을 위해 남의 살을 먹었지만 그것을 재미로 삼지는 않았다. 단단히 말라붙은 동물의 생기가 침에 녹아 입 안에 달게 맴돌았다. 노인은 의식처럼 느리게 씹었다. 한 줌의 곡식과 말린 고기와 나무열매. 소박하지만 든든한 식사였다. 길잡이 막대를 쥐고 ...
대기실 안의 모든 것은 표백한 것처럼 희었다. 그는 새하얀 카우치에 앉아 불편한 기색으로 목깃을 추스른다. 분기마다 한 차례씩 돌아오는 건강검진을 제외하면 그가 의학연구소에 찾아올 일은 드물었다. 일반적인 병원이라면 으레 맡을 수 있는 소독약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 완벽한 무색무취의 공간은 자연과 거리가 먼 캐러밴 안에서도 가장 부자연스러운 곳이었다. 여간해...
아이는 테두리가 깔쭉깔쭉한 연녹색 이파리를 따내 옆구리에 끼고 있는 광주리 안에 넣었다. 오전에 내린 빗방울에 연한 잎을 골라내는 손가락 끝이 촉촉하게 젖었다. 아이는 이파리 하나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다가 입에 넣고 씹는다. 시큼한 맛에 눈코입이 한데 모인다. 아이는 도리질을 치면서도 입 안에 든 것을 오물오물 씹어 삼키고는 다시 부지런히 잎을 따낸다. 작은...
휴가는 끝났다. 그는 소중한 편지를 가슴에 품고 밀린 일거리가 기다리는 캐러밴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숨을 쉰다. 그나마 이번에 작업중인 문헌은 상태가 꽤 좋았다. 그것은 적어도 산산히 부서진 양피지 조각을 핀셋으로 이어가며 풀칠을 할 필요나, 읽는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보안 문장을 해제하기 위해―이런 함정에 당해 직장을 그만두는 연구원이 사오 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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