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러밴 승객단지의 아늑한 카페, 살롱 드 에스파스에는 어느새 단골이 되어버린 세 사람을 위해 지정석까지 마련되어있었다. 그녀는 팔걸이의 흠집마저 익숙해진 자리에 몸을 묻고 연인들을 기다린다. 항상 몸의 일부처럼 지니고 다니는 만년필과 수첩은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나른한 시선은 가게 안을 분주히 오가는 급사들의 팔랑이는 옷자락을 따라 느리게 유영...
◆ 개요 테이라의 테라 아트라 대륙에 위치한 '검은바다숲' 아트라 게베사는 밤바다처럼 검고 광활한 냉대림 지대로 마고스 드라고의 마력을 증폭시키는 에너지장인 '영맥'의 흐름이 강하여 저명한 마고스 다수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대 푸른달군주는 젠의 몰락 이후 혼란으로 가득하던 대륙을 평정하고 영맥의 흐름이 고이는 자리에 제단을 세워 성지로 삼았다. 군주...
연구무역함 캐러밴 중앙통제구역의 최심층부에는 오직 캐러밴의 설립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작은 방이 있다. 이제는 고서적으로 분류되는 오래된 자료들과 골동품으로 가까운 집기로 가득한 방. 낡고 바랜 설계도와 연구서의 페이지들이 곳곳에 걸려 있는 이곳은 연구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추억을 보존한 장소에 가까웠다. 그리고 여전히 서로의 가장 절친한 친우인 함...
에리히 슈미츠를 만나는 것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한 일이었다. 점심 시간 즈음의 히파티아 공학대학 캠퍼스에서 소년은 어렵지 않게 후줄근한 차림의 검은 머리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남자를 보는 순간 확신한다.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저건 절대로 ‘로키’가 아니다. 남자는 벤치와 무릎 위에 핫도그와 탄산음료를 늘어놓...
세계는 검은 대지와 갈색 대지로 이루어져 있다. 먼 옛날 검은 대지에는 사람의 아이들이 있었다. 무른 살에 간사한 영혼이 깃든 나약한 생명이었다. 다만 그들 가운데 총명한 여인이 있어 대지에 흐르는 순수한 근원의 힘을 빌어 기적을 베풀었다. 사람의 아이들은 총명한 여인과 그의 제자들을 일컬어 마녀라 하였다. 그들은 마녀의 도움으로 무리를 이루고 번성하였다....
토모요의 시선은 화면 위에 흩어진 자료들 사이를 느리게 헤엄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건과 인물들 틈에서 그녀는 느슨한 연결 고리를 조심스럽게 건져낸다. ‘15년 전의 폭발 사고.’ 그 해는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다. 밀폐된 건물의 가스 누출로 인한 질식 사고. 고층 빌딩 건설 현장에서 추락한 자재로 인해 발생한 사고. 유로파 ...
캐러밴이 탄생한 이후 수십년간 연구자들이 발견하고 해석하여 저장한 정보는 그 규모를 감히 추측하기조차 어려운 무한한 지식의 총체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새롭게 마주쳐야만 했다. 심지어 캐러밴의 탐구자 중 몇 명 정도는 그 자신이 살아 숨 쉬는 신비이기도 했다. 현대의 지식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미제의 존...
업무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늦은 밤. 안전요원 S는 연구단지 복도를 순찰하고 있었다. 연구원들이 자리를 비운 새벽의 연구단지는 적막하고 어둡다. 복도에는 비상등 아래를 걷는 S의 군홧발 소리만이 텅. 텅. 텅……. ……달그락. S는 반사적으로 안전장비에 손을 뻗으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희미한 기계음과 발소리 사이에서 무언가 조그만 쇳소리 같은 것이 작지만...
“변호사님과는 ‘어떻게’ 알고 지내시는 건가요?” 그녀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찻잔을 들어올리던 손이 공중에서 덜그럭 멈춘다.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 껄끄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남자가 다른 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처럼 노골적으로 떨떠름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는 저...
에스마라 카시아 베릴린, 캐러밴 생물학연구소의 식물유전공학부 연구원이자 제국의 열일곱번째 공주, 그리고……반역자. 그것도 아주 당황스럽고 화난 반역자였다.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관리직원용 통로를 지나 개인 연구실로 돌아오자마자 카시아는 깊숙히 눌러 쓰고 있었던 후드를 벗어 아무렇게나 집어던진다. 짧게 자라난 가늘고 곱슬곱슬한 올리브색 머리털이 모양...
그녀는 연구실장의 사무실 문 앞에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사무실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아직 이른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한 발 앞서 찾아온 방문자가 있는 모양인지 나직한 말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온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오고 가는 말의 어조만으로도 사뭇 심각한 화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지 궁금...
……여기는 서늘하고 외로운 곳이야. 내가 태어난 설산만큼은 아니지만. 거기는 정말로 춥고 고독한 곳이지.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두자. 대신 네가 조그만 어린아이였던 시절을 이야기해줘. 부드럽고 통통한 얼굴에 웃음과 눈물이 새긴 아름답게 물결치는 주름과 시간이 남긴 찬란한 지성의 흔적 대신 천진한 무지와 강가의 고운 모래만이 묻어 반짝이던 시절. 따뜻한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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