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손가락 사이에서 만년필이 미끄러지는 감각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든다. 이지러진 문장 끄트머리에 작은 잉크 얼룩이 생겼다. 눈썹을 모으고 문서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동그란 안경을 벗고 눈 주위를 문지른다. 너덜너덜한 종잇장에 고개를 박고 번역에 골몰하던 그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괜찮습니까?” “오……괜찮아요. 잠이 ‘조금’ 부족해서.” 그녀는 연...
해온글방의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이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일은 없었다.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제레미아. 다만 제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캐러밴은 다시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우주로 떠난다. 그녀는 여전히 가벼운 미소를 짓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다정한 손길을 내밀었지...
하날뫼의 선착장은 밤늦도록 분주했다. 뱃사람들은 식료품과 비품을 보급하고, 무역품을 선적하고, 여행객들은 승선 수속을 진행한다. 내일 오전, 캐러밴은 다시 출항한다. 드디어 제 몫을 다 한 선원들은 마치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출항이라는 듯 왁자지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의 후손은 하룻밤 사이에 우주의 반대편 끝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세상은 여...
그는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 소리에 눈을 뜬다. 막 동이 트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잠기운이 묻어나는 눈을 문지르던 그는 창문 밖의 가로등에 모여앉은 조그만 날짐승들이 명랑한 소리로 재잘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저 녀석들이 범인이군. “안녕, 제레미아.” 그녀가 잠이 덜 깬 소리로 키득거리며 그의 가슴팍을 간지른다. 왼다리는 여전히 그의 배 위에 올라와 있었다...
태초의 대지와 바다는 혼돈이었다. 해가 뜨면 모든 짐승은 서로를 먹고 서로에게 먹히며, 해가 지면 혼돈에서 태어난 어둠이 그들의 남은 혼을 먹었다. 하루는 상서로운 노을 속에 홀연히 나타난 현명한 이가 있었다 현명한 이는 땅을 딛고 물을 건너며 어둑시니를 물리고 죽은 짐승들의 혼을 일으켜 새 육신과 지혜와 말씀을 주었다. 몸을 얻은 그들의 거죽은 짐승과 다...
“수고가 많으세요.” “감사합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지나가던 연구원들이 인사를 건네자 안전요원 S가 마주 경례를 붙인다. S가 순찰중인 연구단지 복도는 업무를 마치고 저녁을 먹거나 퇴근하기 위해 연구실에서 나온 연구원들로 붐비고 있었다. 순조로운 이동을 위해 통로 한 쪽에 붙어 대기하던 S는 어느 정도 사람이 빠져나가자 다시 순찰을 시작했다. 연구...
이데아 유로파 레기온의 시가지 끝자락에는 갓 사회에 내던져진 어린 청년들을 위한 조그만 집들이 모여 있었다. 세상에 뛰어들 준비를 마친 야심 가득한 이들과 싱그럽고 찬란한 시절을 노래하며 즐기는 이들로 조용해질 날이 없는 떠들썩한 거리. 여기 작은 회색 집의 새로운 입주자들도 기대와 설렘을 안고 이 거리로 온 청년들 가운데 하나였다. “드디어 끝났구나! 이...
그녀가 옷을 입어보기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 그는 자신이 입을 옷을 직접 고르기로 했다. 사실 그녀가 그에게 내민 옷은 충격적일 정도로 깜찍한 무늬가 들어간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정작 자신의 옷으로는 편안한 디자인의 튜닉이나 부드러운 재질의 카디건을 고르고 있었으면서―스스로 고르지 않으면 아무래도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
그는 손바닥만한 거울 앞에서 거칠거칠한 턱을 문지른다. 눈가의 그늘은 밤 사이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오늘은 휴일이었고, 그는 어제 늦은 밤까지 일에 매달려 있었다. 기한이 한참이나 남아 있는 작업이었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는 것보다는 집중할만한 일거리를 붙들고 머리를 박고 있는 편이 나았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어.’ 터무니없이 작은 크...
아침이 와도 해가 뜨지 않을 희미하고 서늘한 어둠 속에서, 베레티 스피넬라는 늦은 밤의 기억을 되새기며 입술을 깨문다. 살갗에 올라온 잔소름을 손으로 쓸며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긴장과 기대로―하지만 대체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소스라친 몸은 쉬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쉰다. 그녀는 사랑의 묘미를 아는 사람이었고, 서로를 알아나가는 과정...
캐러밴의 연구원들은 범우주적으로 공인된 괴짜 집단이다. 각 분야의 전문지식과 지성, 열정을 두루 갖춘 학자들의 모임이란 다시 말해, 자신의 전문 분야를 제외하면 아는 것이 없는,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라고는 되지 않는 흥분한 책벌레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잊어서는 안 된다. 날고 기는 천재들이 한데 모여 연구를 합네 실험을 합네 온갖 주접을 떨며 소란...
신기한 여자였다. 곧고 가는 목덜미와 나른한 눈매가 암사슴 같은 여자, 강철과 플라스틱으로 지어진 도시에서 길을 잃은 님프. 숲을 연상시키는 푸른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감미롭게 지저귀는 목소리는 듣기에 좋았다. 남자는 이 묘한 구석이 있는 외계의 여인에게 흥미가 있었다. 어쩌면 가여운 친우의 절실함이 되려 남자의 구미를 돋우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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