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러밴 연구단지 문화예술교류연구소 담당으로 배정된 신입 미화원을 위한 추가 권고사항> 1) 엿듣지 마세요. 진행중인 연구 내용이나 연구원의 사생활에 대한 소문을 유포하다 적발될 경우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미화원은 청소를 위해 고용된 관리직원입니다. 간식이나 커피 심부름 등의 사소한 잡무 보조 지시를 이행할 의무는 없습니다. 3...
에리히 슈미츠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위험한 도전보다는 안전하게 돌아가는 길을 선호하고, 천재적인 재능보다는 노력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 색다를 구석이 없는 외모에—굳이 꼽는다면 흔치 않은 색의 눈동자 정도일까—특별한 관심의 중심에 설 일이 없는 종류의 사람. 그런 것들이 에리히 슈미츠가 생각하는 평범함의 기준이었다. 덕분에 그의 일상은 언제나 익숙하...
그녀의 해사한 얼굴이 차게 굳는다. 그는 죄지은 것처럼 가슴이 무겁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는 것조차 버거워 고개를 숙인다. “……그, 당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통에……미안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설득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종족의 존망이 걸린 문제 앞에서 마니카는 결사적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부탁을 선뜻 받아들...
“제레미아?” 티탄과의 대담 내용을 간추리던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노트패드를 들여다보던 그는 눈에 띄게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제레미아의 어머님께서 ‘기자’였다고 하셨지요?” “아……예. 취재기자로 일하셨습니다. 지금은 사진작가로 활동중이십니다만…….” 우물거리며 말을 흐리던 그는 잠시 무엇인가를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와 묻...
회의는 언제나처럼 시시하고 지루했다. 가이아 행성경비군 발키리 사령관이 시미타르 방위대 총대장과 치열한 언쟁을 벌이는 동안 남자는 사령관 제복에 달린 훈장의 수를 세었다. 스물 일곱을 세는 사이 협상이 결렬되었다. 완고한 입매의 사령관은 제복을 입은 티탄들을 거느리고 회의장을 떠난다. 폐회사도 없이 회의가 끝났다. 임원들은 웅성거리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선...
“베레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선은 허공에 멎어 있었다. “베레티?”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재차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티탄들은 말씨름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만년필을 쥔 채 가만히 멈추어 있는 그녀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그녀는 긴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아주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그를...
문화예술교류연구소 공용 휴게실은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만원이었다. 연구원들은 자리에 앉아 커피나 홍차 따위를 마시며 논문이나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며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모여드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신경질적으로 데이터패드 모서리를 두드리던 그가 나지막히 묻는다. 「자리를 옮기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
「―다음 목적지는 행성 ㄱㅏ이아, 가이아입니다. ㅇㅣㅂㅎㅏㅇ 예정 시ㄱ, 은―」 연구무역함 캐러밴 시미타르 방위대 전투정찰기 격납고 상층부의 작전상황실. 벽면에 내장된 스피커가 갈라진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소리에 피곤한 얼굴로 보고서를 작성하던 상인이 이맛살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제 내가 저것 좀 고쳐놓으라고 하지 않았냐? 신경에 거슬리지도 않...
그는 물이 데워지고 나서야 커피를 마시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업무 시간이 한참은 지난 늦은 밤이었다. 오늘만큼은 일을 내려놓고 느긋하고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가지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무심코 집어든 일거리를 잠시 들여다본다는게 벌써 이 시간이다. 사실 마감이 한참이나 남아있는 일이라 굳이 야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본디 S는 그다지 성실한 인간이 아니었다. 특출나게 뛰어난 군인도 아니었다. 돈과 명예에 목을 매는 부류도 아니었고, 호기심이나 모험심과도 거리가 멀었다. 타고난 허우대를 제외하면 어느 하나 특별할 것이 없는 아주 보통의 티탄. S는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 S가 모두가 마다하는 험한 싸움터만을 전전해온 것은, 투철한 극...
그녀는 나른한 눈으로 남자의 품 안에 기대누워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쉰다. 남자가 드물게 침대에 머물러 곁을 내준 덕분이었다. 머리채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녹작지근하게 가라앉은 몸 위로 가벼운 잔물결이 흐른다. 남자는 그녀의 연한 잎사귀 위에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속삭인다. “나의 꽃.” 하얀 가르마에 입술이 가볍게 붙었다 떨어진다. 흘러내린 연녹색 ...
아이가 있었다. 철저히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아이들 가운데에서도 아이는 가장 엄선된 존재였다. 아이는 장래가 촉망되는 영재였다. 단란한 가정에 입양되어 바르게 성장했더라면 위대한 공학자나 탁월한 기술자가 되어 이름을 널리 알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평범하지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줍음이 많지만 상냥하고 유쾌한 사람이, 일말의 가식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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