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늘하고 외로운 곳이야. 내가 태어난 설산만큼은 아니지만. 거기는 정말로 춥고 고독한 곳이지.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두자. 대신 네가 조그만 어린아이였던 시절을 이야기해줘. 부드럽고 통통한 얼굴에 웃음과 눈물이 새긴 아름답게 물결치는 주름과 시간이 남긴 찬란한 지성의 흔적 대신 천진한 무지와 강가의 고운 모래만이 묻어 반짝이던 시절. 따뜻한 강물...
‘이럴 줄은 알았지만 정말 개판이군.’ 안전요원 휴게실에 들어선 S가 생각했다.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소모할 방법을 찾아내기 위한 S의 탐구는 현재진행형이었다. 하지만 연구단지 내부 탐사는 애저녁에 마친지 오래였고, 사격연습장에서 헛된 총질이나 하는 것도, 체력단련실에서 무게를 치는 것도 금세 질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기숙사 침대에 온종일 늘어붙어있을수...
초인종이 울린다. 나른한 고요 속에 창문을 넘어온 햇살이 카펫 위에 비스듬히 누운 늦은 오후였다. 토모요 바즈케즈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반창고가 감긴 하얀 손가락으로 자판을 톡 건드렸을 뿐이다. 동시에 현관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손님이 들이닥쳤다. “이제 나와 보지도 않는구만.” 등 뒤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토모요...
때는 바야흐로 그늘모임의 계절. 자흐덴에도 어김없이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이베르나의 흰가지 대군락으로부터 먼 길을 찾아온 방문자들이었다. 봄맞이에 버금가는 활기로 술렁이는 해질 무렵의 광장은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는 일라나이로 온통 부산하다. 그러나 모두가 손님맞이 준비에 여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흐덴의 기록자 베레티 스피넬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
이후로는 다시 일상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생활 공간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지급받은 보급품이 모자란 것은 없는지, 식사에 어려움이 있지는 않은지. 주변 연구원들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무엇보다도 항상 ‘도움’이 되어주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는걸요.” 그녀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다정한 온기가 전해진다. 변호사는...
그녀는 손가락 사이에서 만년필이 미끄러지는 감각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든다. 이지러진 문장 끄트머리에 작은 잉크 얼룩이 생겼다. 눈썹을 모으고 문서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동그란 안경을 벗고 눈 주위를 문지른다. 너덜너덜한 종잇장에 고개를 박고 번역에 골몰하던 그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괜찮습니까?” “오……괜찮아요. 잠이 ‘조금’ 부족해서.” 그녀는 연...
해온글방의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이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일은 없었다.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제레미아. 다만 제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캐러밴은 다시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우주로 떠난다. 그녀는 여전히 가벼운 미소를 짓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다정한 손길을 내밀었지...
하날뫼의 선착장은 밤늦도록 분주했다. 뱃사람들은 식료품과 비품을 보급하고, 무역품을 선적하고, 여행객들은 승선 수속을 진행한다. 내일 오전, 캐러밴은 다시 출항한다. 드디어 제 몫을 다 한 선원들은 마치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출항이라는 듯 왁자지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의 후손은 하룻밤 사이에 우주의 반대편 끝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세상은 여...
그는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 소리에 눈을 뜬다. 막 동이 트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잠기운이 묻어나는 눈을 문지르던 그는 창문 밖의 가로등에 모여앉은 조그만 날짐승들이 명랑한 소리로 재잘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저 녀석들이 범인이군. “안녕, 제레미아.” 그녀가 잠이 덜 깬 소리로 키득거리며 그의 가슴팍을 간지른다. 왼다리는 여전히 그의 배 위에 올라와 있었다...
태초의 대지와 바다는 혼돈이었다. 해가 뜨면 모든 짐승은 서로를 먹고 서로에게 먹히며, 해가 지면 혼돈에서 태어난 어둠이 그들의 남은 혼을 먹었다. 하루는 상서로운 노을 속에 홀연히 나타난 현명한 이가 있었다 현명한 이는 땅을 딛고 물을 건너며 어둑시니를 물리고 죽은 짐승들의 혼을 일으켜 새 육신과 지혜와 말씀을 주었다. 몸을 얻은 그들의 거죽은 짐승과 다...
“수고가 많으세요.” “감사합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지나가던 연구원들이 인사를 건네자 안전요원 S가 마주 경례를 붙인다. S가 순찰중인 연구단지 복도는 업무를 마치고 저녁을 먹거나 퇴근하기 위해 연구실에서 나온 연구원들로 붐비고 있었다. 순조로운 이동을 위해 통로 한 쪽에 붙어 대기하던 S는 어느 정도 사람이 빠져나가자 다시 순찰을 시작했다. 연구...
이데아 유로파 레기온의 시가지 끝자락에는 갓 사회에 내던져진 어린 청년들을 위한 조그만 집들이 모여 있었다. 세상에 뛰어들 준비를 마친 야심 가득한 이들과 싱그럽고 찬란한 시절을 노래하며 즐기는 이들로 조용해질 날이 없는 떠들썩한 거리. 여기 작은 회색 집의 새로운 입주자들도 기대와 설렘을 안고 이 거리로 온 청년들 가운데 하나였다. “드디어 끝났구나! 이...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